한글 디자이너, 최정호
“나는 이 분야에 손을 대기 시작했을 무렵 여러 난관에 부딪쳤다. 이렇다 할 스승도 없었고 특별한 참고 서적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나의 이런 전철이 나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젊은이에게도 똑같이 되풀이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작은 길잡이가 되고플 따름이다. 나보다 훨씬 유능한 젊은 디자이너가 더 아름답고 세련된 한글을 만들어주기를 바라면서 두서없는 졸문을 적는다.”
나의 경험, 나의 시도
한글꼴 설계의 기초
감각적 설계와 구성적 설계
글꼴을 만드는 것은 예술이 아니므로 ‘글자를 쓴다’고 말하는 것보다 ‘자형을 설계하다’는 말이 적합하다. 글꼴 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읽기 쉽고, 아름다운 문자를 설계하는 것이다. 여기에 디자이너 각자의 개성에 따라 그 성격이 반영된다. 글꼴의 설계는 어떤 일정한 규칙이나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디자이너 각자의 다년간에 걸친 연구와 경험으로 설계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감각적 설계’와 ‘구성적 설계’가 있다. 감각적 설계는 머릿속에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하나의 선이 떠올랐을 때, 그 선이 적합한가를 순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구성적 설계는 글자의 이상형에 도달하자면 어떤 선이 필요하며 그 선의 배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각자에 따라 다르며 비교적 구성적 설계가 사색의 시간이 더 길지만 두 경우 모두 많은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한다.
안정감과 친밀감
글자란 사상이나 뜻을 전하는 도구이다. 특별한 조건이 붙지 않는 한, 읽는 이가 피로감을 느끼지 않아야 하고, 무엇보다 읽기 쉬워야 한다. 글을 읽으면서 독자는 글자에 담긴 사상이나 환경을 상상하고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보기 좋고 안정된 글자는 심리적으로 읽기 좋다. 한편, 글자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 속에서 생겨난 민족적 성품이 포함되어 제각기 독특한 멋과 맛이 담겨 있다. 민족 고유의 성품은 물론 그 민족의 육체적인 면까지 스며 있다. 그러므로 깨끗하고 짜임새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체질에 어색하게 보이면 읽는 이의 눈에 거슬릴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낯익은 글자와 비교했을 때 친밀감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조각 자모가 부드럽지 않고 몹시도 쌀쌀한 느낌이 든다고도 하나 그것의 원인은 원도에 있을 것이다. 원도를 설계할 때부터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요소를 넣는다면 틀림없이 그대로 재현될 것이다.
글자의 계류와 개성
하나의 글자는 이들이 모여서 문장을 형성할 때 그 형태가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글자는 의미 없는 낱글자의 나열보다 의미가 이어지는 일련의 문장으로 배열되었을 때 독서력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낱글자들은 서로 긴밀하게 엮여질 수 있어야 한다. 글자 하나를 예쁘게 쓴다고 훌륭한 글꼴디자이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글자가 하나로 모여 조화로워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글자에는 제각각 개성이 있다. 아무리 기하학적인 선으로 구성되었다 하더라도 특성이 없으면 식별하기 어려워 독서가 어려워진다. 로마자의 세리프(serif)는 글자의 개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글자를 보는 시선의 흐름을 좋게 한다. 그러므로 글자의 선에는 개성을 담아야 한다
글자의 크기와 착시
크게 썼을 때와 작게 썼을 때 글자의 형태는 달리 보일 수 있다. 이는 시각적 착각, 다시 말해 착시에서 오는 것이다. 크게 쓸 때에는 잘 어울려 보이는 글자도 축소하면 찌그러져 보이고, 작게 쓸 때 아담하고 또렸하던 글자도 이것을 확대하면 엉성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전에서 쓰는 작은 크기의 글자꼴와 간판용으로 쓰는 글자꼴은 애초에 그 균형과 비례를 다르게 해야 한다. 또 인쇄 기술이 정밀해져서 글자가 작아지는 추세이므로 같은 크기에서도 크게 보이도록 속공간을 키워서 설계해야 한다. 특히 신문은 제한된 지면에 많은 내용을 담기 위해 글자가 작아지므로 같은 공간에서 최대한 크게 보여야 한다. 한글은 정체로 써도 장체가 되므로 평체로 그리는 것이 더 커 보인다. 또한, 검은 바탕 글씨보다 흰 바탕의 글씨가 더 커 보인다.
안정감과 친밀감
최정호는 한글 디자인을 이끌어 나갈 후배들에게 앞으로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글꼴 관련 용어를 정의해야 한다. 글꼴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각 부분에 대한 정확한 명칭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도 연구자에 따라 용어를 다르게 쓰고 있다. 특히 최정호는 명조체라는 명칭이 잘못되었음을 여러 번 강조했다. 명조체 대신 ‘세해서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사실 ‘명조체’는 중국 명나라 시대에 유행한 한문 서체인데, 대가 쓴 이 한글에 왜 명조체란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좋은 이름으로 바꿔주었으면 한다.”
최정호, 《꾸밈》, 1978년
둘째,
크기에 따라 다른 디자인의 활자 제작이 필요하다. 원도활자시대와 새활자시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의 원도를 그리면 자모조각기를 통해 활자의 크기를 크거나 작게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활자가 크고 작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작은 활자와 큰 활자의 원도가 같은 글꼴이라도 둘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큰 것을 축소하면 작은 글자가 되고 더 축소하면 더 작은 글자가 균형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시각적 착각에 따라 크게 볼 때와 작게 볼 때의 글자 형태는 달라 보인다. 가령 가로줄기와 세로줄기의 대비가 큰 초호 활자를 그대로 5호 활자로 축소할 경우 그 결과는 가로줄기가 너무 가늘어져서 가독성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작은 활자일수록 가로줄기와 세로줄기의 대비를 작게 설계해야 한다.
셋째,
같은 글꼴이라도 세로짜기와 가로짜기에 따라 두 가지를 따로 만들어야 한다. 가로짜기와 세로짜기에 따라서 글자사이와 높이가 달라 보인다. 하지만 인쇄업체 대부분은 그 번거로움과 과다 출자의 두려움에서 양쪽을 겸해 사용할 수 있도록 원도를 부탁하는 형편이다.
넷째,
다양한 글꼴을 만들어야 한다. 로마자는 수많은 글꼴이 있으며 글자 수가 많기로 으뜸가는 한자만 해도 명조체, 청조체, 송조체, 정해체, 행서체, 고딕체 등 다양한 종류가 있고 굵기도 여러 단계로 세분되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글꼴이 많아야 내용에 따라서 다양하게 특징 있는 표현이 가능할 것이며 글의 내용을 더욱 효과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글꼴은 시대에 부응해 미적 감각이나 습성이 많이 바뀔 것이므로 한글꼴은 이에 따라 연구하고 개척해야 할 과제가 많다.
“나는 국문을 쓸 때 옛 사람이 쓴 한글 서적을 많이 뒤져본다. 예스럽게 인쇄된 것 뿐 아니라 규수들이 손으로 베낀 『낭자전』 따위도 모두 외울 만큼 들여다봤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현대화하기는 너무도 벅차고 지난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낄 뿐이었다. 미미한 성과지만, 이것을 디딤돌로 다음 세대가 결실을 맺어주리라 희망해본다.”
최정호, 『활자문화의 뒤안길에서』, 《신동아》, 1970년 5월
덧붙여 한자 글꼴을 우리 손으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자는 대개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을 쓰고 있다. 한자에 일본 것, 한국 것이 다를 것이 있겠느냐고 한다면 그만이지만 실상은 중국과 일본 한자는 그 풍모가 서로 다르다. 우리도 우리 민족의 생리에 맞는 한자를 개발해야 한다.
다섯째,
글꼴 복제에 관한 법규 마련이 필요하다. 최정호의 활자체와 사진식자체는 당시 호평을 받은 만큼 많은 인쇄소에서 복제되었다. 이런 글꼴의 복제는 글자꼴을 계속해서 개선해나갈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함은 물론 경제적 어려움으로 새로운 한글 디자이너의 탄생에도 걸림돌이 되었다. 글꼴에 대한 권리를 법으로 보호해주어야만 젊은이들이 의욕적으로 글꼴 개발에 종사할 수 있다.
여섯째,
한글, 한자, 로마자의 섞어짜기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한글만 있을 때와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짤 때에는 판면의 인상이 달라 보인다. 예를 들어 한글과 한자를 함께 썼더니 한글이 커 보여서 한글을 조금 작게 그려보았는데, 너무 빈약해 보였기 때문에 다시 키워야 했다. 과학 관련 책에서 한글을 로마자와 함께 쓸 째 조화롭지 못한 경우, 가로짜기를 할 때 띄어쓰기와 글자사이가 고르지 못한 상황 등 섞어짜기로 인한 어려움을 자주 볼 수 있다.